오랫동안 격조드렸습니다. 답장이 늦어진 것에 먼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숙부님께서도 아시듯이 최근 죽은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답장을 드릴 새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의 하관까지를 마치고서야 잠시 숨을 돌릴 겨를이 났습니다. 생전에 아버님께서는 한 영지를 다스린다는 것에는 어린 저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지요. 아버님은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홀로 처리하셨는지 오늘도 그 분이 그리워집니다. [각주:1]
다만 이전에 보내 주신 숙부님의 서신은 저를 크게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변경백령의 정당한 계승권자로서 말하건대, 제가 아직 어리고 그로 인해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그 요구는언급할 가치 없는허튼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미진한 점은 제 스스로 채워나가야 할 점이지 숙부님의 등 뒤에 숨고자 하지 않습니다. 또한 대대로 아버님과 이 가문에 충성을 바쳐 온 늙은 신하들이 제 곁에 있을 것인데 무엇을 걱정하시는가요? [각주:2]
아버님의 뒤를 이을 정당한 계승권이 제게 있다는 사실은 왕국의 누구라도 이해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숙부님의 이런 요구가 더욱 납득가지 않습니다. 이전의 숙부님이라면 그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거라는 사실을 압니다. 변방의 야만인들에 맞서 싸우다미치는 이들이 많다는 소문이라면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숙부님께서 그런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의심하는 날은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저 역시 통탄스럽습니다. [각주:3]
슬픔 속에서 말씀드립니다. 이 일에 대해서 저희의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으리라는 점은 저도, 숙부님께서도 이해하시는 바이리라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부디 뜻을 거두어 주셨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러실 의사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숙부님께서 변경백령의 계승권에 대해 재판을 요청하셨다는 이야기가 이 북방에까지 들려오더군요. [각주:4]
저는 다만 세인들의 입에 불미스러운 일로 고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반기지 않을 뿐입니다. 오랫동안 이 나라의 수호자셨던 아버님의 뜻이 흐려질 것이 두렵습니다. 이리 계속해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니, 이 일의 끝엔 바라지 않는 결착만이 있을 뿐이겠지요. [각주:5]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총점: 4점
사랑하는 조카에게
형의 소식에 애도를 표한다. 어린 네가 감당하기에는 큰 슬픔이고, 무거운 짐이겠지. 이런 시기일수록 집안의 어른으로서 네 곁에 머무르며 도움을 주어야 할 텐데, 전장의 먼지가 채 닦이지 못한 어깨가 무거워 아직 찾아가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거라. [각주:6]
이런 일이 닥치고서야 아련하게추억이 된 지난 날들이 떠오르니 삶이란 것이 비정하다. 형님께선 말년에 얻은 자식인 너를 늘 걱정하셨다. 몇 번이고 너를 잘 부탁한다 당부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형님께서 그리 가시고, 이제 너무 늦었더라도 지금이라도 그분께서 맡기신 나의 책무를 다할까 한다. [각주:7]
이전의 서신에 내 뜻은 충분히 전달한 것으로 믿는다. 아직 어린 네게 변경백령을 지키는 책무가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남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총명한 너라면 알아주지 않겠느냐? 네가 충분히 장성하여 이 고귀한 의무를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네 아버지와 피를 나눈 형제로서 너를 돕고자 한다. [각주:8]
그럼에도 네가 나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짐을 스스로 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지. 그러나 그 뜻이 정말로 너의 진심이라면 나는 우려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겠구나. 이 서신을 받고 네가 입장을 철회하기를 바란다. [각주:9]
북벽은 이 왕국의 최전선이며, 왕국을 지키는 유일한 방파제라는 사실을 우리 가문의 인간이라면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지. 북벽이 무너지면 우리를 믿는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은 야만인의 창칼에 무참히 유린당하고 말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경계하며 자라왔다. 너 역시 그 무게를 이해하리라는 사실을 안다. 왕국의 방패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경시당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각주:10]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바란다.
=총점: 8점
숙부는 조카의 편지를 받고 그의 서신에 담긴 동요와 분노를 읽어냅니다. 육친의 사망이라는 큰 사건을 겪어낸 그가 현명하고 신중하게 변경백령을 통치하는 것은 지난하리라 판단합니다.
조카는 숙부의 편지를 받고 동요합니다. 자신의 미숙한 편지에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요구가 부당한 일은 아닙니다. 어린 자식을 대신해 고인의 형제가 대리 통치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요. 두 번째 서신을 작성하는 펜은 자신의 뜻을 솔직히 펼치지 못하고 자꾸만 멈추고 맙니다.
결과는 왕의 회신에 달렸습니다.
변경백령의 계승자, 고 아르티어스 변경백의 불민한 자식이 땅 위를 걷는 모든 것의 지배자이시자 만민 만세에 경의 받아 마땅하신전하께 충심을 다해 글을 올립니다. [각주:11]
모든 이를 굽어살피시는 전하의 인자함이 변방의 이 척박한 땅에도 깃들어 계심에 신민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부끄러운 집안 사정이 이리 널리 알려져 도리어 왕도의 일만으로도 심려 깊으실 전하의 눈과 귀를 어지럽혀드려 통탄스런 마음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각주:12]
수백 년의 역사를 거쳐 소신의 가문은 늘 왕실과 함께 해왔으며, 왕국의 충성스런 가신으로서 북방을 지켜왔습니다. 저희의 충심과 북방의 젊은 아들딸들이 바쳐온 더운 피가 깃든북벽은 오늘 이 날까지 단 한번의 외침도 허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늘 그럴 것임을 전하께서도 아십니다. [각주:13]
선조께서 대대로 그 고귀한 의무를 다해왔듯이, 저 역시 돌아가신 아버님의 과업을 이어 전하께 평생의 충성을 다하고자 이제 정당한 계승자의 이름을 걸고 서약을 바치려 합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경백령은 집안 다툼으로 그 의무를 등한시해온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저의 부족함으로 비롯되었다는 점에 참담한 슬픔을 느낍니다. 허나 후대의 이들에게 변경백의 이름을흑역사로 남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각주:14]
변경백령의 충실한 신하가 왕께 문안을 올립니다. 나날이 날이 서늘해지고 북벽도 희끗한 머리를 얹을 시기, 이 북방까지 행차하시는 길에 불편함이 없기를 성심으로 기원드립니다.[각주:16]
일전의 말씀과 같이, 형님 되시는 고 아르티어스 변경백께서 국경의 안정을 위해 바쳐온 충성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전하께오서 그에게 내린 치사에 그의 혈육으로서 그 대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평생에 걸쳐 왕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 온 형님께서라면 무엇보다도 전하의 그 말씀에 평생의 보답을 얻었다 말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각주:17]
그가 떠났더라도 북벽은 여전히 깨어짐 없이 굳건하게 왕국의 북방을 지킬 것입니다만, 북방 민족의 힘이 나날이 왕국에게 칼날을 겨누는 이 시기, 더 이상 변경백위를 비워두지 않고자 합니다. 조카는 아직 어리고 미숙합니다. 곁에서 도울 이가 필요하겠지요. 형제의 못 다한 업을 동생된 이로서 잇는 것이 저의 역할이리라 믿습니다. 비록 그가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제가 안을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지려 하나, 그 역시 그의 충심으로 받아들여주시기를 청합니다. 혈육으로서 곁에서 그의 책무를 덜어 주고 슬픔을 달래는 것 또한 숙부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오서 편을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말씀 올립니다. [각주:18]
대대로 저희 가문의 아들딸들은 북방을 지키며, 의무를 다하며 자라왔습니다. 몸에 남은 전상은 자랑거리였고 국경을 베고 쓰러지더라도 영광으로 여겨왔습니다. 왕국에 막대한세금 또한 바쳐왔습니다. 이제 신하로서 전하의 이끌음을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각주:19]
왕은 조카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당신이 이 변경백령의 정당한 주인임을 이해하고 당신을 지지한다고요. 공식적인 재판의 결과는 숙부의 섭정권 요청이 부당하다는 판결으로 맺어졌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유감을 표한 그는 변경백령을 떠나 국경으로 향합니다. 숙련된 전사인 그에게는 그 곳 역시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그렇더라도 변경백령의 주인이 된 조카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육친인 숙부의 귀환을 묵시적으로 바란다는 뜻을 비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